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여전히 숨 가쁘게 흘러갔지만, 내 안의 속도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구름을 덧댄 성민의 그림이 내 머릿속에서 둥실 떠다녔다. 창의력이라는 이름의 낡은 엔진에 아주 오랜만에 윤활유를 칠한 기분이었다. 이제 막 시동이 걸린 엔진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제자리를 맴돌았다.
그 맴돌던 엔진을 데려간 곳은 ‘낡은 필름’이라는 카페였다. 대로변에서 한 블록 안쪽에 자리 잡은 이곳은 간판부터 빛바랜 흑백 사진 같았다. 창밖으로는 작은 화단이 보였고, 오래된 영화 포스터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삐걱이는 나무 바닥을 밟고 안으로 들어서자, 묵직한 커피 향과 함께 아날로그 재즈 선율이 나를 감쌌다. 익숙한 라떼 한 잔을 받아 들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손에 든 만년필을 만지작거렸다. 노트 위엔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지만, 괜스레 마음이 차분해졌다. 여기가 바로 내 새로운 캔버스 같았다.
따스한 햇살 아래, 펜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경쾌한 종소리가 울리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내 앞 테이블에 낯익은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준오 오빠, 여기 있었네?"
민지였다. 밝은 금발 숏컷은 여전히 에너지가 넘쳤고, 화려한 패턴의 블라우스가 카페의 고요함과는 대조를 이뤘다. 그녀의 손엔 얇은 서류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여기까지 웬일이야?"
"오빠, 어제 회사로 등기 우편 하나 왔던데? 주소가 집이 아니라 회사로 되어 있어서 내가 챙겨왔지. 중요한 건가 싶어서."
민지는 봉투를 내밀었다. 평소라면 무미건조한 공문서이거나, 업무 관련 자료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얇은 봉투의 재질과 겉면에 적힌 투박한 글씨체가 낯설었다. 발신인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수신인에 내 이름, 그리고 주소는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회사 주소 대신, 아주 오래 전 살았던 집 주소였다.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잊고 지냈던 과거의 그림자가 불쑥 다가온 듯했다.
"혹시… 옛날에 뭐 두고 온 거 아니야? 아니면 헤어진 여자친구라도?" 민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봉투를 받아 들었다. 내 손에 쥐어진 봉투는 묘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내용물을 짐작할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열어보고 싶지 않은 충동과 동시에, 반드시 열어봐야 할 것 같은 강한 이끌림이 공존했다. 봉투는 마치 닫힌 상자처럼, 과거의 어떤 순간을 고스란히 봉인해둔 것만 같았다. 민지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별다른 말없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다시 한번 카페 안에는 재즈 선율만이 가득 찼다.
나는 봉투를 노려봤다. 낡은 종이의 질감이 손가락 끝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어떤 과거의 내가, 어떤 기억을 내게 보내온 걸까. 잠시 잊고 지냈던, 혹은 애써 외면했던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에 땀이 났다. 나는 봉투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망설였다. 지금 열어야 할까? 아니면 이 잊었던 조각을 다시 묻어두어야 할까? 나의 잃어버린 속도를 되찾는 여정에서, 이 편지는 과연 어떤 의미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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