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지가 건넨 편지는 얇았다. 손에 쥐었을 때 느껴지는 종이의 질감이 묘했다. 아주 오래전의 기억처럼 바스락거릴 것 같으면서도, 내 손 안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뜨거운. 지난 며칠 밤낮, 나는 그 편지를 열어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책상 한편에 무심하게 던져두었지만, 그 존재감은 노트북 화면의 빼곡한 숫자들보다 훨씬 강렬했다. 마치 과거가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 나는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섰다. 평소라면 회사 근처 식당에서 민지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편지 봉투가 머릿속에서 자꾸 아른거렸다. 마치 열어보지 않으면 안 될 숙제처럼, 내 발걸음을 어느 한적한 골목으로 이끌었다. 그곳에는 ‘페이지의 쉼터’라는 간판을 단 작은 카페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래된 책 냄새와 커피 향이 섞인 공기가 나를 감쌌다. 낮은 조명 아래 빽빽하게 꽂힌 책장들, 푹신한 소파, 그리고 곳곳에 놓인 작은 스탠드들이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창밖의 도시 소음은 이곳에 닿지 않는 듯했다. 마치 시간마저 느리게 흐르는, 고요한 독서실 같았다. 나는 가장 안쪽, 책장 깊숙이 파묻힌 듯한 자리에 앉아 익숙하게 라떼를 주문했다.
따뜻한 라떼 한 잔이 내 앞에 놓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 온기가 손끝을 넘어 가슴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나는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편지 봉투를 꺼냈다. 손끝으로 봉투의 거친 종이 질감을 다시 한번 더듬었다. 그리고 마침내, 봉투를 뜯어냈다.

따뜻한 라떼 한 잔의 온기가 가슴에 스며들 때, 준오는 조심스럽게 오래된 편지 봉투를 뜯어냈다.
단정하게 접힌 편지지를 펼치자, 낯익은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준오에게.'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들.
*“잘 지내? 벌써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르겠네. 네가 졸업 전시 때 만들었던 그 ‘미래 도시 프로젝트’ 스케치, 아직도 기억나. 네 눈이 그렇게 반짝이던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 그때 우리가 했던 이야기들, 다 기억하고 있니? 언젠가 꼭 다시 만나 그때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편지를 읽는 동안, 잊고 살았던 시간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스무 살, 꿈에 부풀어 밤샘 작업을 하던 내 모습. 노트북 화면이 아니라 종이 위에 만년필로 스케치를 하던 뜨거웠던 나. 내 금테 안경 뒤에 숨어버린, 피곤해 보이는 눈 대신 열정으로 반짝이던 그 눈빛. ‘미래 도시 프로젝트’는 분명, 지금의 내가 진행하는 도시 개발 프로젝트와는 달랐다. 그때는 도시의 속도를 쫓는 대신, 도시를 꿈꾸게 만들고 싶었다.
편지의 마지막에는 발신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유진’. 대학 시절, 내 프로젝트의 유일한 팬이자 가장 날카로운 비평가였던 친구였다. 나는 만년필을 꺼내 편지지 위에 맴돌게 했다. 만년필의 차가운 금속 감촉이 손가락 끝을 자극했다. 유진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잊고 살았던, 아니 잊으려 했던 나를.
라떼는 이미 식어 있었지만, 내 안은 뜨거웠다. 유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지금의 내가 그 시절의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창밖을 보니, 아까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햇살이 옅어지고 있었다. 시간은 흐르는데, 내 안의 물음표들은 더욱 짙어졌다.
**오늘의 카페:** 페이지의 쉼터 **오늘의 발견:** 잃어버린 과거의 꿈과 열정을 담은 편지. 그리고 다시 마주할 용기.
나는 편지를 다시 접어 봉투에 넣었다. 유진을 만날 용기가 생길지, 아니 그보다 먼저, 잊었던 과거의 나를 다시 만날 용기가 생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단지, 편지 봉투가 내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만이 현실이었다. 그 사실이 나를 다시금 고민하게 만들었다. 유진에게 답장을 해야 할까? 어떤 답장을 해야 할까? 망설임은 깊어지고, 내일의 나는 또 다른 질문 앞에 서 있을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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