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NER
AI로 만든 브런너 연재3화무료
비가 그친 뒤의 보관소

기억의 미로 속으로

유안의 손이 은밀한 서고의 묵직한 문고리를 밀었다. 삐걱이는 낡은 나무 문이 마침내 열리고, 안쪽에서 훅 끼쳐오는 서늘한 공기가 유안의 뺨을 스쳤다. 일반 기록 보관소의 정돈된 먼지 냄새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곳은 흙내음과 오래된 종이가 습기에 젖어 눅진해진, 어떤 생명체라도 숨 쉬고 있을 것 같은 습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그의 푸른 기운 도는 흑발이 미세한 바람에 흔들렸다.

서고 내부는 상상과는 달랐다. 빽빽한 책장이 늘어선 대신, 벽면 가득 오래된 그림자와 형언할 수 없는 문양들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바닥에는 이끼 낀 돌들이 불규칙하게 깔려 있었고, 그 사이로 아주 가느다란 물줄기가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기록들은 책이나 파일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벽면의 움푹 파인 곳마다 투명한 유리관이 박혀 있었고, 그 안에는 깃털, 마른 꽃잎, 닳아버린 동전, 심지어는 작은 돌멩이 같은 조각들이 홀로 떠 있었다. 모두 빛을 잃고 색이 바랜 채였다.

유안이 서고 안으로 발을 내딛자, 폐역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낡은 회중시계가 그의 손목에서 차가워지는 듯했다. 그는 자신이 폐역의 가장 중요한 원칙을 깨뜨린 대가를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 순간, 유리관 중 하나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였다. 그 빛은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불규칙적으로 명멸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한 줌의 마른 흙이었다. 흙은 옅은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기록은, 기록사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지, 아마.”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유안은 화들짝 놀라 돌아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밝은 주황색 오버사이즈 작업복을 입은 오지나가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문가에 서 있었다. 등에 멘 커다란 공구 가방이 둔탁하게 바닥에 닿는 소리가 폐역의 고요를 깨뜨렸다. 그녀의 왜소한 체구는 어둠 속에서 더 작아 보였다.

“지나 씨.” 유안의 목소리에는 당혹감과 미묘한 죄책감이 섞여 있었다.

“어, 서고 문을 열었네? 흐음, 역시 그 학생증 때문에 그랬나?” 오지나는 짐짓 명랑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유안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이곳은… 어떤 곳이죠?” 유안은 시선을 거두고 유리관 속의 붉은 흙을 다시 바라봤다.

“말했잖아, 또 다른 기록들이 잠들어 있는 곳. 하지만 이건 단순한 기록이 아니야. 이건… 흔적이야. 그 사람의 감정, 의지, 고통이 녹아든 흔적.” 오지나는 유리관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나지막이 설명했다. 그녀는 유안이 규칙을 깼다는 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 대신, 그 이면에 숨겨진 위험을 암시하는 듯했다.

“내가 펜을 주운 순간부터 폐역이 흔들렸어. 그게 이 흔적들의 반응인가요?” 유안이 물었다. 그의 사색에 잠긴 눈빛에 불안감이 서렸다.

오지나는 유안 옆으로 다가와 낡은 공구 가방에서 작은 망치 하나를 꺼내 유리관을 가볍게 두드렸다. ‘쨍’ 하는 맑은 소리가 서고에 울려 퍼졌다. “응. 어떤 기록은 건드리면 안 되는 거야. 기록사가 아니라, 기록이 기록사를 삼켜버리거든.” 그녀는 유안을 힐끗 보며 덧붙였다. “기록은, 주인을 찾기 위해 때때로 스스로 움직이기도 하니까.”

오지나가 말하는 동안, 유안은 문득 윤서의 학생증을 떠올렸다. '지워줘'라고 적힌 알 수 없는 문구. 그리고 자신의 과거와 겹쳐 보이는 그 이름. 그는 붉은 흙이 담긴 유리관에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으려는 순간, 유리관 안의 흙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 파편처럼 부서진 이미지들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빗속을 헤매는 소녀, 낡은 교복, 그리고 흐릿한 비명 소리…

그 순간, 서고 저편의 그림자 속에서 윤시후의 실루엣이 스르륵 나타났다. 그는 회색 롱 코트를 입고 푹 눌러쓴 페도라 아래로 눈빛을 감춘 채, 손에 든 필름 카메라를 유안을 향해 들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폐역의 고요를 찢었다. “그 기록은, 주인이 사라진 채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지. 하지만 이제 깨어났어.” 윤시후의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서고의 습한 공기를 가로질렀다. “그 소녀는, 자기 자신을 지워달라고 외쳤던 게 아닐 수도 있어.”

유안은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윤시후를 바라봤다. “그럼… 뭘?”

윤시후는 대답 대신, 카메라를 내리며 유안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둠 속 한 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여태 보지 못했던, 다른 유리관들보다 훨씬 크고 투명한 유리관이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텅 비어 있었다.

“기록은… 비어 있는 곳을 가장 두려워하지.” 윤시후의 말과 함께, 텅 빈 유리관 안에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 숨겨진 퍼즐 조각처럼, 누군가에게 지워진 '하루'의 윤곽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윤서의 '잃어버린 하루'가 단순히 지워진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대체될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유안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건… 윤서의 잃어버린 하루가 아니야. 이건…" 유안은 말을 잇지 못했다. 텅 빈 유리관 속에서, 희미했던 그림자가 더욱 짙어지며 어떤 형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에 젖어 온통 찢기고 흐릿해진, 한 장의 낡은 종이 조각이었다. 그 종이 위에는 단 하나의 글자만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살려줘.’

그 글자는 마치 핏자국처럼 붉고 선명했다. 유안은 자신이 열었던 서고 문이, 윤서의 '사라진 하루' 뒤에 감춰진 거대한 비극의 입구였음을 깨달았다. 이제 되돌릴 수 없었다. 그 글자는 유안의 손목에 감긴 낡은 회중시계를 뚫고 그의 심장에 박히는 칼날 같았다. 윤서가 지워달라고 말한 것은, 과연 자신의 하루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존재'를 갉아먹는 어떤 거대한 비밀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