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NER
AI로 만든 브런너 연재6화무료
비가 그친 뒤의 보관소

지워져야 하는 날짜

은밀한 서고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먼저 왔다. 삐걱, 하고. 그 다음에야 유안의 귀에 젖은 숨소리가 따라붙었다. 눅진한 공기가 목구멍까지 밀려 들어왔다. 흙내음과 젖은 종이가 섞인 냄새가 혀끝을 눌렀다.

“왔구나.”

그 말이 놀랍게도 조용했다. 오지나는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등 뒤 공구 가방 끈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쓸었다. 습기 때문에 천이 미끄럽게 달라붙는지, 손끝이 잠깐 멈췄다.

유안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못했다. 서고 안쪽 어둠이, 방금 전까지는 문고리 뒤에 숨어 있다가 이제는 벽 전체로 퍼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 방에는…… 아무도 안내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유안이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는데, 말끝이 미세하게 마른 종이를 긁는 소리를 냈다.

“듣긴 뭘 들어. 네가 열었잖아.” 오지나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 반쯤은 모자가 가렸지만, 눈빛만큼은 어쩐지 웃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네 손은 그 문고리 쪽으로 이미 마음을 갖고 있었어.”

유안은 대답을 미루었다. 대신 품속의 종이 냄새를 확인하듯 손가락을 펴서, 방금 전에 윤서의 마지막 하루를 기록하던 낡은 펜을 떠올렸다. 그 펜을 줍고 결심했던 순간이, 아직도 손바닥 안쪽에 남아 있었다.

“윤서의 기록은요.” 유안이 물었다. “여기, 아니면 다른 곳에 있어요?”

오지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동시에 공구 가방 지퍼가 가볍게 눌리는 소리만 났다. 안에서 금속이 서로 부딪히는 듯한 소리. 유안은 본능적으로 그 소리에 시선을 뺏겼다.

“있긴 있는데, 여기엔 없어.” 오지나가 말했다. “그리고 있긴 한데, 네가 찾는 방식이 맞는지부터 틀려.”

“무슨 뜻입니까.”

“너, 방금 전까진 ‘기록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같은 표정이었잖아.” 오지나가 말끝을 늘이지 않았다. “근데 지금은 ‘기록이 어떻게든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는 표정이야.”

유안은 입술을 다물었다. 자신이 표정을 바꾼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오지나는 그 차이를 정확히 집었다. 유안이 원칙을 붙잡아야만 하는 이유가, 어느 순간부터 오지나의 손안에서 설명되는 것 같아 싫었다.

오지나가 서고 한쪽을 가리켰다. 벽에서 반쯤 튀어나온 선반. 그 선반에는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는데, 제목이 없어 보였다. 대신 표지마다 날짜만 얇게 적혀 있었다. 날짜 위로 빗물 자국처럼 푸른 얼룩이 지나갔다.

“이쪽이 네가 열어온 길이야.” 오지나가 말했다. “윤서 하루 말고, 더 아래에 있는 것. 네가 열었을 때, 문이 ‘어딘가’로 너를 데려온 게 아니라, 네 손이 ‘어딘가’에 닿은 거거든.”

유안의 시선이 선반 날짜 위에 멈췄다. 그중 하나가 시야에 붙었다. 유안이 이전에 우연히 본, 자신의 과거와 겹친 날짜. 밤비가 그친 뒤에도 잊히지 않던 그 숫자.

“이건—” 유안이 숨을 들이켰다. “제가 본 학생증에서 번졌던 날짜랑 같은데요.”

오지나가 웃음을 삼킨 듯한 숨을 내쉬었다. “같아도 상관없어. 같은 날이란 건 너무 흔해. 문제는, 같은 날이어도 어떤 날은 지켜야 하고 어떤 날은—” 그녀는 말을 끊었다. 공구 가방 끈을 한 번 더 손가락으로 쓸고는, 이번엔 지퍼를 아주 천천히 열었다.

“지워져야 해.”

그 말이 유안의 신경을 긁었다. 유안은 원칙을 가진 사람답게 질문부터 던졌다.

“누가 지웁니까?”

“너는 묻는 걸 좋아하네.” 오지나가 지퍼를 완전히 열지 않은 채, 천 조각 사이에 감춰둔 얇은 금속을 손으로 찾아냈다. “그런데 네가 묻는 방식은 늘 같은 곳만 파고들어.”

유안은 그제야 깨달았다. 오지나가 보여준 공구 가방 안은 공구 상자 같지 않았다. 가방의 내부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종이 냄새와 섞여 있었다. 금속은 있어도, 그건 연장들이 아니라—기록을 다루는 도구의 냄새였다.

유안이 한 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가져올 겁니까.” 오지나가 먼저 묻지 않았다. 대신 유안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유안의 손목에는 낡은 회중시계가 있었다. 그는 그걸 습관처럼 만지는데, 지금은 만지지 않았다. 만지지 않고도, 회중시계가 그의 맥박을 대신 측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리할 겁니다.” 유안이 말했다. “이건 제 책임이에요. 윤서 기록도 그렇고, 저와 겹치는 그 하루도.”

오지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책임을 말하면서 손을 먼저 쓰네.”

유안은 멈췄다. 스스로도 방금 한 행동이 흔들렸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 오지나를 찾았으면서, 정작 지금은 오지나의 도구를 손에 쥐려고 했다.

“원칙이 있습니다.” 유안이 입술 사이로 말을 내뱉었다. “기록에는 손을 대지 않습니다. 다만—”

“다만 뭐?” 오지나가 재촉했다. 재촉이라기보다, 유안이 스스로 무너질 틈을 찾는 목소리였다.

유안의 시선이 선반의 날짜로 다시 돌아갔다. 그 날짜 옆, 표지의 가장자리 어딘가에 아주 얇은 글자가 있었다. 빛이 각도를 바꿔 닿을 때만 읽히는 정도.

유안이 가까이 다가가 책의 표지를 살폈다. 거기에는 날짜 아래로 ‘누락된 구간’이라는 문구가 아주 작은 글자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 누군가 펜으로 덧칠한 듯 번진 흔적.

하유안.

자기 이름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여기 붙어 있었다.

유안은 숨이 턱 막히는 대신, 오히려 차분해졌다. 눈앞의 사실이 너무 명확해서 감정이 설 자리가 줄어든 것 같았다.

“이건 누구 기록입니까.” 유안이 물었다.

오지나는 지퍼를 더 열어, 공구 가방 속에서 납작한 금속판을 꺼냈다. 금속판 한가운데에는 얇은 홈이 있고, 그 홈 안에 작은 결속 고리가 걸려 있었다. 결속 고리는 열쇠처럼 생겼지만, 열쇠로는 보이지 않았다.

“너.” 오지나가 말했다.

“저요.” 유안이 되물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가 지키려고 했던 하루가.” 오지나가 금속판을 들고 유안 쪽으로 가져왔다. “근데 이상하지? 넌 네 하루는 지키는 데에 왜 그렇게 서툴렀을까.”

유안은 반사적으로 손을 내렸다. 공구 가방과 도구는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도구가 가리키는 방향이 그에게는 이미 손에 잡힌 느낌이었다. 선반의 ‘누락된 구간’이 그의 과거가 아니라, 그의 선택이 누락된 자리라면?

유안은 윤서의 마지막 하루에서 느꼈던 것과 다른 종류의 불길함을 떠올렸다. 기록은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장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록을 바꾸는 건 하루를 바꾸는 게 아니라, 그 하루를 ‘기록할 수 있게 만드는 원리’를 흔드는 일이다.

오지나가 갑자기 말했다.

“너한테 손댄 거, 네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있었어.”

유안의 눈이 흔들렸다. “무슨 말입니까.”

“윤서 기록이 네 손을 잡게 된 게 우연 아니듯, 네 이름이 여기 붙은 것도 우연이 아니야.” 오지나가 금속판의 홈을 손가락 끝으로 한번 문질렀다. 금속에서 축축한 종이 냄새 같은 것이 아주 약하게 올라왔다. “문고리도 그렇고, 네가 연 순간도 그렇고. 너를 움직인 건 네 원칙이 아니라, 네가 잃어버린 기억이야.”

“기억은—” 유안이 말하려다 멈췄다. 말하면 더 선명해질 것 같았다. 더 선명해지면 더 끔찍해질 것 같았다. 그는 회피하는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

“보여 주세요.” 유안이 말했다. “내가 누락된 구간에서 뭘 잃었는지. 제가 선택을 했는지, 누가 대신했는지.”

오지나가 잠깐 정지했다. 웃음이 사라진 얼굴. 하지만 그녀는 곧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밝은 주황색 작업복 자락이 젖은 바닥에 스쳤다.

“좋아.” 오지나가 말했다. “그럼 너도 약속 하나 해.”

“약속?”

“도구를 쥐진 말아. 쥐는 순간, 네가 지키려던 원칙이 아니라, 네가 원하는 바뀜이 먼저 움직여.” 오지나는 도구를 유안 손 가까이까지 가져왔다. 그럼에도 그녀의 손은 멈춰 있었다. “넌 보고만, 판단만 해.”

유안은 그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동시에 유혹적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보고만’이라는 조건은 그의 성격에 맞았다. 손을 대지 않으면 책임도 덜해지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유안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이었다.

서고 어딘가에서 필름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딱 한 번. 이어서, 공기 온도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오지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안도 시선을 돌렸다.

그곳은 벽도 선반도 아닌, 문턱 너머처럼 비어 있어 보이는 틈이었다. 그런데 그 틈 사이로 아주 얇은 빛이 통과했다. 마치 누군가 필름 카메라의 렌즈를 틈에 대고, 방금 사진 한 장을 찍고 물린 것처럼.

“찍었나?” 오지나가 낮게 말했다.

그 틈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윤기 없이, 바람처럼.

“관찰은 기록이 되지 않지.”

윤시후였다. 회색 롱 코트의 어깨가 틈을 타고 드러났다. 페도라 챙 아래로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손엔 오래된 필름 카메라가 있었다. 그는 사진을 찍은 자세 그대로 멈춰서, 유안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하유안.” 윤시후가 말했다. 이름을 정확히 불렀다. 유안은 그 한 단어에 가슴 쪽이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감정이 아니라 반응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도달했다는 반응.

윤시후는 카메라를 내렸다. 필름 바디 옆면에 조그만 금속 라벨이 보였다. 라벨에는 글자 대신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유안의 이름이 적힌 날짜와 같은 계열의 색.

“너희가 지금 보는 건.” 윤시후가 천천히 말을 골랐다. “누락된 구간이 아니라, 누락되도록 설계된 구간이다.”

유안이 말문을 열었다. “누락되도록 설계했다는 게—”

“설계한 사람은 기록을 지키려 했다고 믿겠지.” 윤시후가 말했다. “하지만 그 설계의 결과로, 누군가는 사라졌고 누군가는 남았다.”

유안은 그 말이 자신의 과거를 향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는 즉시 따지지 않았다. 오지나가 도구를 들고 있었고, 윤시후가 증언을 들고 있었다. 지금은 한쪽만 믿으면 넘어질 것 같았다.

그 사이 오지나는 갑자기 도구를 품에 숨겼다. 아주 빠르게. 유안의 눈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결정은 확실히 빨랐다.

“유안아.” 오지나가 불렀다. 평소처럼 명랑하게 시작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이제 나가. 여기 더 들어가면 너도 네가 뭘 보고 있는지 잃어버릴 수 있어.”

윤시후는 대답 대신 유안이 선반의 날짜를 바라보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메라 옆 손가락이 아주 가볍게 움직였다.

그 순간, 유안의 시야 가장자리에서 책 표지가 조금씩 움직이는 듯했다. 마치 젖은 종이가 파도처럼 휘는 것처럼. ‘하유안’이라는 글자가, 물기 때문에 더 번지기 시작했다. 유안은 자신이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글자가 바뀌는 걸 느꼈다.

그건 단순한 착시가 아니었다.

“이미 바뀌고 있군요.” 유안이 말했다.

오지나가 입을 다물었다. 대답하지 않는 침묵이, 대답보다 더 명확했다.

유안은 그제야 깨달았다. 오지나가 ‘도구를 쥐지 말라’고 했던 건, 도구가 위험해서가 아니라—도구 없이도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오지나가 숨기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유안은 한 번 숨을 내쉬고, 선반 쪽으로 몸을 더 기울였다. “저는 보고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유안의 손이 선반의 책 옆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는 도구를 쥐지 않았다. 대신 책 표지의 가장자리, ‘하유안’ 아래로 번져가는 글자에 손끝을 대었다.

촉감이 이상했다. 종이가 아니라, 얇은 막을 만지는 느낌. 눅진한 공기가 손가락 끝을 붙잡았다. 유안의 회중시계가 손목에서 아주 짧게 울린 듯했다. 소리라고 하기엔 너무 미세했다. 대신 머릿속에서 ‘딱’ 하고 무언가 걸리는 느낌.

유안은 자신도 모르게, 아주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 숨이 끝나기도 전에 선반의 날짜가 바뀌었다. 종이 위의 숫자가 다시 쓰이듯 정리됐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누락된 구간’이 아니라, 다른 문구가 보였다.

‘기억 보관 완료.’

완료.

유안은 손끝 아래에서 종이가 마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느꼈다. 마르는 건 종이만이 아니었다. 그의 생각, 그의 확신, 그리고 원칙이 조금씩 얇아지는 감각이 따라왔다.

오지나가 유안의 손끝을 향해 달려오려 했지만 늦었다. 윤시후는 그저 카메라를 들었다. 이번엔 찍지 않았다. 셔터 옆 다이얼만 아주 천천히 돌렸다.

“찍진 않을 거야.” 윤시후가 말했다. “하지만 네가 방금 한 건, 사진보다 더 오래 남아.”

유안은 손을 거뒀다. 도구는 없었다. 그런데도 기록은 바뀌었다. 그럼 무엇이 시작한 걸까. 누락된 구간을 고친 게 그의 손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이미 그 ‘변경’을 끝내놓고, 유안에게 증명만 하게 만든 건가.

유안은 입술을 떼었다. 말하기 전, 그는 스스로의 약속을 떠올렸다. 보고만 하겠다. 판단만 하겠다. 손대지 않겠다.

그런데 지금 그는, 기록을 만진 사람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오지나.” 유안이 불렀다. “이 금속판—너는 왜 숨겼습니까.”

오지나는 잠깐 숨을 삼켰다. 그리고 웃음을 억지로 끌어올린 대신, 솔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