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빗줄기가 지나간 폐역 보관소는 더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하유안은 17번 보관함에서 꺼낸 낡은 학생증을 손가락 끝으로 만졌다. 빛바랜 사진 속 학생의 얼굴에는 불안이 스며 있었고, 이름란에는 물에 번진 글씨로 ‘윤서’라고 흐릿하게 적혀 있었다. 그 아래, 붉게 바랜 잉크로 덧쓰인 ‘지워줘’라는 문구가 심장을 후벼 파는 듯했다. 유안은 손목의 낡은 회중시계를 습관처럼 쓸어 올렸다. 째깍거리는 소리가 묵직한 시간의 무게를 상기시켰다.
유안은 폐역 기록사의 권한으로 윤서의 기록을 열람했다. 푸른 기운이 도는 흑발이 어깨 위로 쏟아져 내렸다. 홀로그램처럼 허공에 펼쳐진 기록들은, ‘윤서’라는 이름의 학생이 겪었던 마지막 하루의 파편들을 스산하게 재생했다. 기록은 감정 없는 파편의 나열이었으나, 유안의 눈에는 그 아이의 떨리는 손, 체념한 듯한 눈빛, 그리고 끝내 내뱉지 못한 절규가 선명하게 보였다. 특정 시각, 윤서가 폐역 주변을 서성이는 장면. 낡은 벤치에 앉아 무언가를 바라보던 뒷모습. 그리고, 갑작스러운 절망의 순간. 기록은 거기서 멈춰 있었다. 더 이상의 움직임도, 소리도 없었다. 완벽하게 침묵하는 기록의 마지막 순간은, 흡사 자신의 과거, 되돌릴 수 없었던 그 순간과 섬뜩하리만치 닮아 있었다.
유안은 자신의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폐역 기록사의 철칙, ‘기록 불변의 원칙’. 어떠한 기록에도 개입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가 폐역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지켜온 신념이자, 과거의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그러나 ‘지워줘’라는 윤서의 절규와 자신의 쓰라린 후회가 뒤섞여, 그 견고했던 원칙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켰다.
“어이, 유안! 거기서 뭐 해?” 폐역의 낡은 철문이 삐걱이며 열리고, 밝은 주황색 오버사이즈 작업복을 입은 오지나가 벙거지 모자를 벗으며 불쑥 나타났다. 등에 멘 커다란 공구 가방이 그녀의 작은 몸집보다 더 커 보였다. “점심때 다 됐잖아. 맨날 기록이랑 씨름하다 밥 거르지 말고, 좀 나와서 바람이라도 쐑!” 지나는 유안의 옆으로 다가와, 흘끗 홀로그램 기록을 쳐다봤다. 순간 그녀의 명랑한 표정에서 미묘한 긴장감이 스쳤지만, 이내 특유의 장난기 어린 웃음으로 가려졌다. “흠, 이거 아주 절절한 기록 같은데? 유안 씨는 기록을 너무 깊이 파고드는 경향이 있어. 다친다고.” “다칠 일 없어. 난 그저 기록을 지킬 뿐이니까.” 유안은 나직이 대답했다. 지나는 유안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지키는 것과, ‘그 속에 빠져드는’ 건 다른 이야기야. 이 폐역의 모든 기록은, 결국 누군가의 ‘시간’이야. 그리고 시간을 바꾸려 하면, 그 대가를 치르게 되지.” “무슨 뜻이야?” “이 폐역은 아주 오래전에 ‘어떤 사고’로 버려진 곳이거든. 그 사고는, 기록에 손을 대려 했던 어리석은 시도 때문이었대.” 지나는 툭 던지듯 말했다. “기록은 단순히 종잇조각이 아니야. 그걸 바꿀 수 있는 도구가 폐역 어딘가에 숨겨져 있긴 하지만, 그걸 만지는 순간, 세상의 시계추가 엉망진창으로 돌아버린다고. 어쩌면, 기록 보관소 자체가 그때부터 멈춰버린 시계인지도 모르지.” 지나의 말이 유안의 가슴을 짓눌렀다. ‘기록 변경의 도구’. 그는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기록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과, 윤서의 ‘지워줘’라는 절박한 외침 사이에서 갈등하는 손. 윤서의 기록 속 마지막 순간, 낡은 벤치 옆에 떨어진 빛바랜 펜 한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그 펜은 마치 유안의 손에 쥐여질 수 있다는 듯, 기묘한 유혹을 내뿜고 있었다.
유안은 천천히 홀로그램 기록에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허공을 가르자, 윤서의 기록 속 펜이 일렁였다. 원칙을 깨고 그 펜을 줍는 순간, 윤서의 마지막 하루는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 아니, 어쩌면 완전히 다른 윤서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새로운 기록’이 과연 윤서를 구원할까? 아니면, 더 큰 비극을 초래할까? 유안은 결심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한 곳을 향했다.
그는 폐역의 가장 깊은 곳,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은밀한 서고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오직 기록사만이 접근할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이 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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